세계 최초 일간신문 1660년 독일 발행보다 83년 앞서

 

신문의 역사는 다시 쓰일 것인가.

지금까지 세계 최초의 일간 신문은 1660년 독일에서 발행된 <라이프찌거 짜이퉁 Leipziger Zeitung>으로 알려져 있다.

인쇄조보 1577 > 라이프찌거 짜이퉁 1660

그런데 지난 4월 경북 영천의 사찰 용화사에서, 16세기 왕조실록에 그 실체가 언급된 바 있는 1577년 조선시대 ‘민간인쇄조보(朝報)’의 실물로 추정되는 문서를 공개했다.

목하 학계의 비상한 관심 속에 후속 검증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 일간지’의 효시는 독일보다 83년 앞선 한국의 <조보>가 된다.

이번에 발견된 인쇄조보의 내용을 보면 “우역(소의 병)이 극성을 부려 전염되어 죽으니 겨울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고 있다. 죽은 수가 600여 마리나 되는 바 공역의 시기에 수레만 있고 소가 없어 만정이 슬피 부르짖으니 처참하여 차마 들지 못한다(….)”와 같은 대목이 눈에 띈다(이상 1577년 11월 15일자). 또 “왕명을 출납하는 곳은 출납을 성실히 해야 하거늘 근래 들어 태만한 태도가 습성이 되었으니 복역(임금께 아뢰어 그 일을 받아들이게 하는 일) 의리는 몹시 적어지고 일찍 마칠 때가 많아 물의가 떠들썩한지 오래이다(…..)”와 같은 구절도 있다(이상 일자 미상, 출처 영천시민신문). 지금 보아도 생생한 당대의 이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에 본래 승정원에서 ‘필사(筆寫)조보’가 배포되었다. 여기에는 관리의 임면, 이동 등 인사 그리고 국왕의 거동, 건강, 경연(經筵) 등의 동정 소식이 실렸다.

필사조보는 조선시대 ‘내부 통보매체’ 20세기 초까지 유지

조보를 연구해온 김영주 교수에 따르면 필사조보는 조선시대에 일종의 ‘내부 통보매체’로서 15세기말(대략 성종대)에 나타나 20세기 초까지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는 통치의 편의성을 도모하려는 뉴스전달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폐쇄성을 띠었고 ‘난초체’라는 속기로 필사되어 주요 독자층인 사대부들이 구독하기에는 불편했다고 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관보성을 지닌 필사조보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선조 때에 민간에서 제작하는 인쇄(印刷)조보가 등장했다. 1577년(선조 10년) 8월 서울에 사는 수명의 백두(白頭, 지체는 높으나 벼슬하지 않은 양반)들이 의정부와 사헌부로부터 발행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승정원에서 매일 출방되는 필사조보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목활자본으로 인쇄조보를 발행해 판매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인쇄조보는 기록에서만 전할 뿐 지금까지 실체가 드러난 적이 없는 문서였다. 말하자면 부전불견(不傳不見)의 상태에 있었다. 그랬던 이 민간인쇄조보가 440년 만에 나타난 것이다. 정확한 것은 학계의 고증이 끝나봐야 알겠지만 대단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용화사에서 공개한 ‘민간인쇄조보’는 1577년 정축년 음력 11월 6일, 15일, 19일, 23일, 24일 등 5일치다. 3개월 동안 발행된 인쇄조보의 전량이 발견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1940년 안동에서 나타난 ‘훈민정음 해례본’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언론사의 측면에서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인쇄조보의 존재를 포착한 선조가 대신들을 꾸짖는 대목에서 등장한다.

선조의 진노 기록

선조는 “내가 우연히 조보를 보건대 (….) 매우 놀랄 일이다. 어째서 아뢰지 않고 마음대로 만들었는가”라고 질책하고 있다. 조보는 즉각 발행이 중단되었고, 선조는 주동자들을 색출하기 위하여 약 45일 동안 취조를 했다고 한다. 이후 조보 발행에 참여한 30여 명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유배를 보냈다고 실록은 전한다.

조정의 허가를 받고 인쇄조보 발행을 한 ‘민간사업자’들은 선조의 진노에 날벼락을 맞았다. 장관이 허락한 것을 대통령이 뒤집은 셈인데, 조선조 민간 신문의 역사는 사실상 필화(筆禍)와 함께 끝난 수난의 언론사다.

1577년 11월 28일, 선조가 보고 격노했다는 문제의 조보가 언제적 무슨 내용을 본 것인지 궁금하다.

선조는 조보를 보고 “사국(史局)을 사설화(私設化)하고 국가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폐간 조치했다. 민간이나 외국에 국가 기밀이 빠져나가고 왕실의 체면이 구겨진다는 것이다.

김영주 교수는 인쇄조보를 공개성과 영업성(판매), 독이성(인쇄)을 갖춘 새로운 정보전달매체로서 평가하였는데 이런 것이 선조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다.

아마도 당시 조정에서는 언로의 확장이나 정보의 유통보다는 봉건 왕조의 권위와 유교적 질서를 더 중요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임금도 아닌 선조 때가 아닌가. 이 때 인쇄조보가 폐간되지 않고 활성화되었다면 세계언론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언론사가 문제가 아니고 선조 이후의 조선시대와 구한말의 역사가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화의 모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15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바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1592). 이른바 ‘신문없는 정부’의 자업자득인가.

돌이켜 보면 고려의 금속활자도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보다 시기적으로 현격히 앞섰다. 하지만 유럽에서 종교개혁과 지식의 보급을 견인한 인쇄술과 달리 금속활자는 이 땅에서 지식정보의 민주화와 대중화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물론 알파벳과 한자의 문자 체계가 다르고, 인쇄기와 금속활자의 운용과 기능이 다른 문제도 있다.

세계 최초 금속활자이어 세계 최초 일간신문 타이틀 얻는다면?

어쨌든 이제는 ‘한국의 금속활자 기술이 구텐베르크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엘 고어의 발언(2005 서울디지털포럼)으로 자위를 하는 상황이다.

  1. 슈뢰더는 근대신문의 특징으로 주기성, 시사성, 보편성, 공공성을 꼽았다. 이번에 용화사에서 공개한 민간인쇄조보가 예의 근대신문에 해당하는지는 학계의 엄정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만약 현지에서 기대하는 바처럼 세계 최초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에 이어, 세계 최초의 활자 조판 형태의 일간 신문이라는 타이틀을 얻는다면 역사적인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명에 의해 폐간되고 300년이 넘는 단절(민간에서 발행하는 인쇄신문의 재등장은 그로부터 319년이 지난 1896년의 독립신문)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다. 게다가 작금 한국의 참담한 언론 현실을 생각하면 ‘세계 최초’ 하나 더 받으면 뭐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 뿐이다.

필자 : 정길화(방송인)

 

 

By 탑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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