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봉헤찌로를 중심으로 모여 산다. 그러며 50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만나는 것이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서로 봐도 무심한 눈초리로 응시하는 것이 봉헤찌로에 사는 한국인들의 자연스러워져 가는 인사 방법이다. 사실상 모여 산다고 말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동네에서 일 하거나 사는 것 뿐이다. 우리들의 사업도 관심도 점점 다양해지며 브라질 지역사회에 적응되어 가며 또한 융화, 흡수 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이민 왔거나 여기서 태어난 2세나 3세들은 한인공동체나 한인회 등의 표현에 전혀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나마 운동이나 종교단체에서 만나는 것이 과거 공동체 생활의 남은 습관일 뿐이다. 공통적인 특징은 자유롭게 들어왔다 나갈 수 있도록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대표성이나 책임 등을 부여하면 아무도 원치 않는다.

더 이상 우리는 브라질내에서 공동체를 구성하고 살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추세로는 우리 공동체의 대표가 되는 한인회의 미래는 없다. 한인회회장의 자발적 후보가 없다는 반복적인 현상이 이 현실을 입증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이 한인회 회장할 때인 2001년에도 “ 한인회가 나를 위해 한 것이 무엇이냐?” 라며 공격적으로 내게 따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우리를 위해 해 준 것이 없어도 우린 한국인이고, 흔히 말하는 5천년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자랑스럽지 않아도 우리는 한민족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브라질에서 우리는 아직까지는 꼬레아노 (COREANO) 이다.

한인들의 특징이라는 정(情)이 다 말라가는 현실 속에서 임대료가 벅차고 식품을 사기가 힘들어 여러 사람이 좁은 방에서 같이 비비고 살며 종교단체에서 받아 오는 음식을 먹으며 전기가 끊겨서 목욕과 빨래를 한지 오래 되어 악취를 풍기며 사는 한국인이 있다면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현실은 한국사람으로서 배가 고픈 사람과 몸이 아픈 사람도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민자들이기 때문에 브라질 정부의 사회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포어를 못 하기 때문에 노동 계약하에 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잘 사는 한국인이라는 선입감 때문에 가난한 서민이나 극빈자에 제공하는 법적, 의료적인 무상 처우도 받지 못 한다.

브라질의 장기적인 경제 불황 때문에 우리 교포들의 미래는 암담하다. “나는 위기에 휘말리지 않을 거야 ” 라고 장담할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없을 것이다. 이미 많은 가게들의 문들이 닫혀 있다.

자본주의가 금전적 이기주의로 업그레드(upgrade)된 사회에서는 결국 각자의 능력과 노력의 대가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게으른 바보에게 동정 할 필요가 없고 그래 봤자 소용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브라질에 있는 우리 한인들의 경우는 현재의 성공과 실패가 각각 한인 교포개인들의 능력과 노력에 따르는 결과만은 아니라고 장담한다. 누가 성공했다면 절대로 그의 독자적인 창조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 이민 선배들과 우리들의 부모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수상 ‘ 처칠 (Winston Churchill)’이 말했듯이 많은 “피와 역경과 눈물과 땀” 을 통해 이민사회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후손들과 이민후배나 한국에서 온 주재상사들에게 아무런 로얄티(royalty)도 받지 않고 거저 주었다. 단지 우리가 같은 한국사람이고 한민족의 후손들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브라질내의 한국인 이민 역사를 보면 너무나 많은 분들이 숭고한 동족애로 거저 준 것을 알게 된다. 임대 보증도 서 주고, 계를 모아 사업자본도 마련해 주고, 말 모르는 사람에게 통역해 주면서 사업의 길도 터 주며, 후손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훌륭한 학교와 지원을 해 주었다. 이민 온 사람들은 “미다 할아버지”를 잊어서는 안 될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성공한 기업가나 판사나 박사 등 누군가의 부모가 이민 왔을 때, 누군가가 임대 보증을 안 해주었다면, 누군가가 의류 제품 업에 대한 힌트를 주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계를 모아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넉넉함과 자만심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이민 오는 한국인들과 주재  상사들은 이런 이민 선배들의 든든한 기반과 1,5세와 2,0세라고 불리우는 그들의 후손들이 없었다면, 시장진출과 이익창출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한국의 모 금융회사가 브라질에 갓 진출해서 아직 방향 감각이 모호할 때, 한국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전 브라질 중앙 은행장 밑에서 일하는 아들을 시켜 무료로 금융계의 모든 접촉을 제공하여 브라질 진출에 도움을 준 적이 있다. 오늘의 우리 한국인의 이민 사회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가 개간한 밭에서 누군가가 뿌려논 씨앗의 열매를 따먹고 있으며, 누군가가 단단하게 다져놓은 흙 위에 밟고 서 있는 것이며, 누군가가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라는 이념으로 공권력이나 살생력을 이용한 협박과 강탈로부터 브라질교포를 음지에서 보호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참 힘든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 하나 하나가 어렵게 버티고 있다.

하지만 우리 주의에서 굶어 죽는 한국인이 발생할 수는 없다. 몸만 배고픈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점점 공동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기주의자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돈의 힘만 믿는다. 하지만 쌓아둔 돈은 사회적인 공익을 끼치지 못한다. 돈 냄새 때문에 주위에 강도들만 어슬렁 거리게 된다. 더러는 “ 도움 받기도 싫고 주기도 싫다. 나와 내 가족만이 나의 관심사이다” 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자들도 부당한 처사나 불이익을 당하면 정의와 법을 따지며 변호사에게 열변을 토한다. 정의나 법은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로빈손 크루소 (Robinson Crusoe)에게는 법이나 정의라는 이념이 필요치 않았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았기 때문이다. 정의나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공동체 각 일원의 존엄성과 안전을 보장하고 일원들간의 존경과 권익에 대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즉 여러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재 금전주위가 찬양하는 이기주의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벌어서 내 마음대로 쓰는데 무슨 개소리냐 !! ” 라고 내뱉는 사람들은 현대사회가 제공하는 장점만 이용해 먹고 베풀지는 않는 사람들이다.

또 어떤이는 “ 내가 충분히 번 다음에 남을 생각할 것이다” 라고 한다. 하지만 옆의 이웃이 굶어 죽은 다음에는 아무리 많은 조의금을 줘도 사람을 살릴 수 없으며 결국 자기 만족용 위선행위일 뿐이다. 도움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 주어야만 한다. 내게 남아 돌아갈 때 주는 것은 위선적인 자기 자랑일 뿐이다. 배고픈 이에게 주는 따뜻한 미역국과 비빔밥은 그의 몸과 영혼을 살린다. 우리 한국인 특유의 정을 받는 그는 다시 인간미를 느끼고 희망을 갖게 되어 삶의 재기를 위해 더러운 흙을 털고 일어날 것이다. 약 10여년 전 어느 가족 중 한 명이 절망 속에서 자살을 시도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동우라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또 누군가가 한국인교포라고 동참하였다. 어느덧 곗돈도 갚게 되었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이 가족의 아버지는 위암으로 돌아가셨지만 새로운 희망을 찾게 해 준 고마운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유언의 편지를 전했다. 이젠 딸들이 취직도 했고 대학도 다닌다고 말이다. 그리고 사는 곳에 오면 대접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사실 도움의 손길을 준 그들도 돈이 넉넉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임대료 내기가 벅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혼자 살아야만 운명을 가진 저주 받은 인간들이 아니다. 우리가 한민족의 후손이라는 것이나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끼리 상부상조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잘못 된 것이 아니다.

지금처럼 힘들 때, 우리는 우리 주의를 돌아 보아야 한다. 누군가가 나보다 더 힘들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 분명히 무엇인가 해 줄 것이 있을 것이다. 왜 브라질 사람에게는 봉사와 기부가 후하면서 우리에게는 그렇게 차가울까? 왜 우리끼리 돕는 것을 우리끼리 당당히 하지 못할까 ?

자국민의 권익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대한민국의 공관과 우리를 대외적으로 대표하고 내적으로는 스스로 보살피기 위해 창립된 브라질 한인회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대응하고 앞장 서야 할 것이다. 화려한 행사를 통해 브라질사회에 우리의 행사추진능력과 우리민족문화의 우수함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자만감을 느낄 수 있지만, 배고프고 희망을 잃어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들의 문제는 오늘 저녁이고 추운 잠자리고 지불하지 못한 학비와 아파트 임대료이고 비싼 의사진료비와 약값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려하고 밝은 것을 좋아하는 불나방이 종종 불에 타 죽는 경우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성은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서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의사 슈바이쳐 박사 (Dr. Albert Schweitzer) 같은 분들의 헌신에 의해 유지된다. 멀리 아프리카까지 안 가도 여기 상파울로 시내에서 우리도 한국인 이웃을 위해 뜻 있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할 때이다.

 

상 파울로, 2017년 8월 16일

권명호 ( 변호사, 제27대 브라질 한인회 전 회장 )

 

 

이상.

 

 

By 탑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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